
(사진 설명 : 미국 필라델피아 켄싱턴 거리의 모습)
산업의 심장에서 마약 오염지대로, 한 도시의 몰락사
한때 ‘미국 제조업의 심장’이라 불렸던 필라델피아의 켄싱턴 거리가 오늘날은 ‘좀비거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대낮 거리에서 쓰러져 있고, 노숙자와 중독자 수만 1만 명에 육박한다. 거리의 풍경은 마치 재난 영화 속 장면처럼 비현실적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이곳에 벌어진 것일까?
19세기 중반부터 켄싱턴은 미국 동부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섬유, 철강, 기계 제조업이 번성했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 왔다. 아일랜드와 독일,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모여 살며 견고한 중산층 커뮤니티를 이뤘고, ‘노동의 도시’라는 자부심도 컸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공장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고, 실직자들은 떠났으며, 남겨진 지역은 점점 빈곤화됐다. 도시는 제대로 된 복구 정책 없이 방치됐고, 집세는 급락하며 슬럼화가 가속화됐다. 빈집과 버려진 공장들은 마약 거래의 온상이 되었다.
1980~90년대에는 크랙 코카인이 퍼지며 폭력 범죄가 급증했고, 이후 2000년대엔 ‘오피오이드 위기’가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켄싱턴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방 진통제 중독에서 시작된 약물 문제는 불법 헤로인과 펜타닐로 이어졌고, 오늘날에는 동물용 진정제 ‘자일라진(xylazine)’이 섞인 신종 마약 ‘트랜크(Tranq)’까지 퍼지며 중독자들이 의식을 잃은 채 길에 방치되는 일이 다반사다.
현장을 방문한 기자들은 “사람이 거리 한복판에서 주사기를 꽂은 채 쓰러져 있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고 전한다. 철도 아래 고가다리 근처는 중독자들의 주요 거점이 되었고, 한 블록마다 마약을 사고파는 거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 경찰은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격리와 관리’에 가까운 접근을 택하고 있다.
켄싱턴에는 여전히 자원봉사자들과 교회, 비영리단체들이 중독자 지원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주거, 의료, 일자리, 교육 등 복합적 문제를 안고 있는 이곳에서 단기적 구호 활동만으로는 변화가 어렵다는 것이 현지 활동가들의 목소리다.
켄싱턴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미국 전반의 정책 실패가 뚜렷이 보인다. 구조조정 이후 지역을 방치한 도시 재개발 실패, 마약성 진통제의 무분별한 남용을 방관한 보건당국, 그리고 중독자를 범죄자 취급만 해온 사법체계 모두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켄싱턴 거리는 단지 미국 내 한 도시의 몰락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경제 양극화, 중독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복지의 빈틈은 어느 나라에서든 직면할 수 있는 문제다. 켄싱턴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폭발한 현장이자 동시에 다른 국가에 보내는 경고장이기도 하다.(한국마약신문=표경미 기자)